종려나무여행

 
 
 
페트라 (기획연재 9)
작성자 : 관리자 2010-01-28 11:47:01

<페트라>

페트라란 '바위'라는 뜻으로 히브리어로 셀라라고 부른다. 요르단의 국보 1호이고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에 속한다. 역대하 25장에 언급된 세일반지가 바로 이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 페트라에 먼저 정착했던 족속은 동굴 거주자라는 의미를 가진 '호리'족속이었으나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들이 이들을 쫓아내고 거주하였다. 에서는 장자권을 빼앗긴 후 이삭이 죽자 헤브론을 떠나 남부 세일 산으로 이주 했으며 그의 후손들이 번성하여 모세가 출애굽할 때도 그곳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에서의 별명은 붉다는 의미인 에돔이었는데, 페트라의 주산지인 셀라의 바위가 붉은 색을 띠고 있고 세일산 주변의 에돔 산지도 붉은 색을 띠고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서에게 별명에 어울리는 땅을 기업으로 주셨음을 알 수 있다. 민수기 13장에 의하면 출애굽 당시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갈 때 이곳 에돔 땅에 이르게 된다. 성경에 보면 출애굽 후 바란 광야의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러 이곳에서 약 2년간 머물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정탐을 하게 되는데 여호와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였던 무리들의 반대로 여호와의 진노를 사게 되었고 이후 그들은 38년간 광야를 헤매게 된다. 민수기 20장에 의하면 이 때 모세는 먼저 세일산에 살던 에돔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당신의 형제 야곱의 자손들이 '왕의대로'를 이용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허용해 달라고 했을 때 그들은 거절을 하였다. 이 때 모세의 형 아론은 죽어 호르 산에 장사지내게 되고 그들은 홍해 변을 따라 아카바로 내려갔다가 에돔 땅을 돌아 동편 광야 길로 올라갔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참여치 못하나 에돔 족속은 너의 형제니 미워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그 후 에서의 후손은 하스모네 왕가에 의해 비록 강제로나마 유대교로 개종함으로써 유대인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모세의 샘>

왕의 대로에 있는 모세의 샘은 지금도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고 있는데 그물은 암반에서 나온 것이어서 마셔보니 시원했으며 지금도 이곳의 사람들이 이 물을 먹고 있다고 한다.

 

<마다바>

마다바는 역대상 19장에 의하면 베드바로 되어있는 곳이다. 다윗이 암몬 왕 나하스에게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하스가 죽자 다윗이 신하를 보내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조문을 하도록 했다. 이 때 암몬의 신하들은 다윗의 신하들이 자기네 땅을 참략하기 위해서 정탐을 하려고 왔다고 하눈을 충동질 하므로 하눈은 신하들의 말만 믿고 다윗의 신하들의 수염을 잘라버리고 옷을 엉덩이 윗부분까지 잘라서 돌려보냈다. 남자들의 수염은 그들의 명예와 권위를 상징하는데 그런 수염을 잘랐으니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옷을 엉덩이 윗부분까지 잘랐으니 아랫도리가 다 나오게 만들었으니 엄청난 모욕을 당한 것이다. 그렇게 다윗의 신하들을 보내고 나서 덜컹 겁이 났다. 그래서 하눈은 아람족을 용병으로 사서 이스라엘과 싸우기 위해서 마다바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을 때 다윗은 그 소식을 듣고 요압과 정예부대를 보내 그들과 싸우게 된다. 용병이었던 아람족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엄청난 패배를 한 후 도망을 쳤다가 이스라엘과 화친을 하였고 다시는 암몬을 돕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해에 암몬 자손은 멸망하고 말았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한 후에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기 까지 잠깐 동안 하스모니아 독립왕국이 세워 졌었는데 그 역사적 장소가 마다바였다. 로마의 형제 콘스탄틴이 AD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마바다는 기독교의 도시가 되었다. 당시 마다바에는 많은 교회가 세워지고 당시 유명한 모자이크 장인들이 모여들면서 비잔틴 세계에 '모자이크 도시'라 불리기도 하였다. 비잔틴 시대에 크게 번성하였던 마다바는 비잔틴 시대가 끝나자 함께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AD740년에 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되어 버렸다. 그리고 약 천년이 지난 1880년대 케락 지역에 살던 기독교인들과 무슬림들 간에 갈등이 심화되자 생존의 위협을 느낀 기독교도들이 당시의 통치자였던 오스만 터어키 정부에 자신들이 살 곳을 정해 달라고 청원을 하여 비잔틴 시대에 기독교가 번성하였던 마다바를 지정해 주므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당시 오스만 터어키 정부는 집은 아무 곳에나 짓되 교회만은 예전의 교회 터에만 짓도록 하였는데 당시의 기독교도들은 교회 터를 찾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하므로 그 결과 AD1884년 마다바 모자이크 지도를 발견하게 되었고 이들은 모자이크를 보수한 후에 지도가 손상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교회를 세웠는데 그것이 성죠지 교회이다. 이 지도는 지금까지 발견된 로마 시대로부터 비잔틴 시대까지의 가장 오래된 지도로 알려져있다. AD542년에 봉헌된 예루살렘의 내아 교회가 지도에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유스티아누스 황제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헤스본 성>

요새라는 뜻을 가진 헤스본은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의 수도였다. 마다바의 북쪽 10Km 지점에 위치해 있는데 동쪽과 남쪽에는 기복이 많은 높은 대지, 북쪽은 구릉지대, 서쪽에는 멀리 유대의 산악지, 가까이는 요단강 유역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헤스본의 아래쪽으로 200m 지점에 솟는 샘물이 있고 그 주변에는 당시의 수조가 남아있다. 이스라엘이 사자를 보내어 시혼 왕에게 당신의 땅을 통과하게 하면 피해를 주지 않고 왕의 대로로만 통과하게 해 달라고 하였으니 시혼왕은 거절을 하고 싸움을 걸어와서 결국 이스라엘 시혼 왕을 이기고 점령한 후 르우벤 지파가 이 땅을 자기네 지파에게 달라고 하므로 가나안 정복 중에 있으므로 모세가 화를 내자 르우벤 지파는 처자식과 가축을 이곳에 남겨두고, 자기들은 무장을 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기업을 얻기까지 돌아오지 않겠으며 앞장서 싸우겠다고 하여 그 땅을 분배받게 되었다. 출애굽의 경로인 라암셋, 마라의 샘이 있는 수르광야, 르비딤이 있는 신광야, 시내산, 바란광야, 아라비아 광야, 바란광야를 지나면서 뜨거운 태양이 작열한 가운데 수풀과 물을 만나기는 무척 어려웠다. 그런데 헤스본 땅에 이르자 초목이 무성한 것을 보자 광야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에 놀라왔다. 목축업을 하던 그들에게는 너무나 풍요로운 땅이었기에 르우벤 지파가 탐을 내었던 것도 이해가 되어싿. 지금의 헤스본 성터는 그대로 방치되어 있으므로 동네 아이들이 그 유적에서 불을 피우며 놀고 있는 모습을 보니 관리되지 못함이 안타까웠다.

 

<느보산>

느보산은 요단 동편 산지와 마다바의 서쪽 7Km지점에 위치해있다. 느보산은 요르단 골짜기, 사해, 유다, 사마리아 산지들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이곳이 순례자들에게 특별한 것은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열망하였으나 가나안을 바라보기만 하고 들어가지 못한 모세 때문일 것이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에 대해서 성경은 므리바 사건에 의해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어찌되었던 모세의 출애굽의 사명은 여기까지 였다. 성지순례는 가고 싶어도 시간, 건강, 여행경비와 기회가 없으면 갈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성지순례를 다녀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이 순탄치 않았음을 피부로 느끼면서 성경이 보다 가까워 졌다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글 · 산울교회 허영희 목사 (성민신학신학연구원장)

 


* 원문출처 : http://revivaltour.co.kr/dg/view.php?&bbs_id=board&doc_num=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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